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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태국 엿보기 25 - 절대군주의 입법화, 태국 제헌절

작성자
재태국한인회
작성일
2025-12-08 13:58
조회
44


[방콕에 있는 민주기념탑 Democracy Monument (อนุสาวรีย์ประชาธิปไตย 아눗싸와리 쁘라차티빠타이)]


왕실에서 시작한 민주화, 절대 왕권에서 민주 제도로


12월 10일은 헌법기념일로 국경일인데 1932년 12월 10일 절대 왕권을 넘어 입헌군주제를 기초로 하는 태국 최초의 헌법이 제정 공포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현재 헌법은 2017년 4월 6일 개정 공포된 것으로 16장 279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제2장이 국왕에 대해 6조에서 24조까지 18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 특이한 조항은 제7조로 “국왕은 불교신자로 종교를 수호하는 자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국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는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절대 군주제가 입헌군주 민주주의 제도로 바뀌는 과정은 매우 흥미 있다. 유럽의 봉건체재가 무너지고 공화정을 거쳐 의회 민주제도가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생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절대군주제 말기 일본의 침략과 미군정 체재를 거쳐 외부세력의 강요에 의해 강제적으로 도입된 민주주의 제도가 단기간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많은 정치적 사회적 시련을 겪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태국의 입헌군주제가 생긴 과정을 돌아보는 것도 태국의 현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1932년 당시 일부 신군부가 중심이 된 자칭 ‘인민당’이라고 부르는 민간인 46명, 육군 영관 및 위관급 32명, 해군 장교 22명 등 100 여명이 주동하였는데 이들은 1926년 경 유럽에 유학 중 이미 태국의 민주화에 뜻을 모으고 인민당을 결성, 거사를 계획하였다고 한다. 1932년 6월 24일 새벽 거사에 성공한 이들은 “군수도보위대”를 만들어 당시 최고 실력자이자 내무장관이며 국왕 라마 7세의 삼촌인 나컨싸완워라피닛 대군을 인질로 잡고 후어힌 별궁에 있던 라마 7세에게 “우리는 왕위를 두고 거사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최고법으로 헌법을 두고 통치하는 정치체제를 목적으로 하며 왕은 귀경하여 우리가 제정한 헌법을 최고법으로 하여 입헌군주로서 계속 왕의 지위를 지켜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미 입헌군주제의 민주화를 염두에 두고 추진하고자 했던 라마 7세는 백성의 안위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여 그들의 뜻을 수락함으로써 태국에서는 전제군주제가 종말을 고하고 무혈혁명에 의한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었다. 

혁명세력에 의해 제정된 태국 최초의 헌법이 같은 해 12월 10일 공포되었다. 이런 이유로 태국인들은 이 무혈입헌혁명에 대해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는데 후세가 없는 라마 7세는 그 3년 후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나고 조카인 아난타 마히돈 왕자가 추밀원의 추대로 라마 8세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는 쭐라롱껀 대왕의 아들인 “마히돈 아둔야뎃” 왕자의 아들로 라마 9세 푸미폰 대왕의 친형이다. 그러니 현 라마 10세 국왕의 큰아버지시다.

태국 역사를 잘 살펴보면 태국의 민주주의는 민중에 의한 하극상의 형태가 아니라 왕실에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앞섰고 국가 발전을 위해 민주주의를 도입하여야 한다는 인식과 민주화 작업이 왕실에서부터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 도입에 대한 시도는 이미 라마 5세 쭐라롱껀 왕이 민주주의를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는데 “민주주의는 훌륭한 것이며 언젠가는 태국인의 통치제도가 되어야 한다” 라고 언급한 라마 5세는 그러나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인식하고 민주주의를 위한 개혁작업을 실시하였다. 

국민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권장하기 위해 노예제도 철폐, 부역 의무 해방 등을 실시했으나 상전에 복종하며 살던 평민들은 자유로운 경제활동이나 생업 유지에 익숙지 못했지만 이때부터 형성된 중산층의 지지 하에 정치 및 사회적인 변화가 요구되었고 민주화의 움직임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왕은 국민의 의식 수준을 높이기 위해 교육 개혁과 교육의 확대 실시를 통하여 부분적이나마 국민을 일깨우고 질적으로 향상시켜 민주주의의 훌륭한 국민이 될 소양을 갖도록 노력하였고 또한 국가행정을 12부로 나누었으며 사법부를 만들어 재판을 법무부가 담당하게 하였고 국가최고회의와 추밀원을 구성하여 국왕과 함께 국사를 논의하게 하고 국비유학생을 해외로 보내며 왕족들은 자비유학을 가도록 권유하였다. 이들은 주로 법률이나 군사학을 전공하였다고 한다.

라마 6세 와치라웃 왕은 왕자 시절 영국에 유학하면서 체험한 민주주의를 태국에 도입하기 위해 선왕의 뜻을 이어 언론제도를 도입하여 국민들이 자유롭게 의사를 발표하도록 하였다. 또한 “두씻타니” 라고 부르는 시범 도시를 만들어 1918년부터 1925년까지 많은 국고를 소비해가며 200명 가량이 거주, 영국식 민주주의에 의한 자치 도시를 운영하는 실험을 했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는 너무 형식적이고 기계적이어서 현실적이 못되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국민의 의식과 교육수준이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1925년 11월 26일 한창 왕성한 때인 44세의 라마 6세가 맹장염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왕위는 그의 동생이며 영국에서 군사학을 공부한 32세의 쁘라차티뽁 라마 7세에 이어졌지만 라마 7세는 왕자 시절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 수업을 받지 않았고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왕위에 올라 최고국정위원회[Supreme Council of State 라고 번역하면 될 듯]를 두고 정치 경험이 많은 5인의 고위 왕족(이 중 3명이 삼촌)을 위원으로 임명하였고 1927년에는 왕족과 고위 관료로 구성된 추밀원을 두어 정치상의 균형을 이루려 했지만 추밀원보다 최고국정위원회가 실권을 장악하였고 라마 7세 본인이 정치 수업은 물론 정치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왕족의 영향력 하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라마 7세도 역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기초를 위해 300만 바트의 왕립교육기금을 마련하여 교육에 투자하였고 제정문제로 라마 6세 말기에 폐지된 왕립유학생제도를 부활하였으며 강한 행정부를 견제하는 의회제도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선왕 때부터 국가의 외교자문으로 있던 미국인 Francis B. Sayre (미국 Wilson 대통령의 사위) 박사에게 태국의 국내외 상황으로 보아 전제군주제가 더 이상 지속되기는 어렵다는 점을 피력하면서 태국에 의회와 헌법이 있는 민주주의 제도 도입에 대하여 자문을 구하였는데 쎄이어 박사는 정부를 견제할 능력이 있는 의회가 구성되어야 하는데 아직은 시기상조이며 우선 국민 대다수가 올바른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라마 7세의 의회민주주의제도 도입과 헌법 초안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세력이 바로 최고국정위원회였는데 위원 중 일인자이며 내무부 장관이었던 담롱라차누팝 대군도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라마 7세는 형식적이지만 왕족 10명, 귀족 및 고급 관료 30명 등 40명으로 의회를 구성하여 자유로운 정치토론의 장을 만들었고 지방자치제도를 도입하여 지방 행정에 대한 감독 의식을 고무시키며 1930년 11월부터 지방자치법을 만들고 짝끄리 왕조 건국 150주년이 되는 1932년 4월 6일에는 헌법을 공포할 계획으로 Raymond B. Stevens 외교자문에게 민주헌법을 연구할 것을 지시하였고 1931년 3월에 완성된 헌법 초안이 국정자문위원회에 회부되었으나 아직은 이르다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쳐 안타깝게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민주주의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라마 7세가 서둘러 헌법을 공포하려 했던 이유가 태국 사학자들간에 아직도 풀리지 않은 역사적 수수께끼인데 자신의 재위 시에 국가의 정체가 바뀌는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왕 자신이 예감했을 것이라고 사학자들은 짐작할 뿐이다.

고위 기득권 계층과 달리 언론들은 왕의 의도를 절대적을 지지하였지만 국민들은 “침묵하는 다수 (Silent Majority)”로 일부 지식인층은 민주주의 제도의 도입을 원했으나 일반 국민들은 정치에 무관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사회 현상과 사건이 군부로 하여금 의회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을 일으키는 동기를 부여하게 된다. 


우선, 티안완 (1842-1915) 라는 급진적인 사상가의 활동이 눈에 띈다. 몬족의 아버지와 포루투칼인 어머니 사이에서 방콕에서 태어난 그는 상인으로, 언론인, 출판인으로 활동하면서 인간 평등, 민주주의 등을 주장하면서 국민 교육, 의회제 도입, 복지 시설 등을 폭넓은 사교활동과 여러 가지 출판물을 통해 주장했는데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서 볼 때 분명히 앞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적지 않은 고급 엘리트층의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태국 역사에 “러써 130” 라고 부르는 사건이 있었는데 수백 명의 하급 장교들이 1911년 즉위한지 1년 안된 라마 6세에 대한 불만으로 민주화를 도모하기 위한 혁명을 계획하였으나 계획이 노출되어 92명의 장교가 처벌받는 사건이다. 라마 5세 시절인 1909년 임관하려는 장교와 당시 황태자 (후에 라마 6세) 의 시종간에 다툼이 있었는데 황태자는 법으로 처리할 것을 주장한 국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장교들을 국방부 앞 광장에서 채찍을 가하는 형벌을 행하여 군부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한가지 이유는 1929년 세계공황의 여파로 국제 쌀 시장에서 쌀 값이 폭락하자 태국 경제가 어렵게 되었고 긴축재정으로 군부를 축소하고 군인을 포함한 공무원들의 급여를 깎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런 일련의 조치로 간신히 재정 균형을 이루었으나 일시적일 뿐이었고 많은 군인과 공무원이 실직하게 되어 불만 감이 팽창하게 되었다.

무시할 수 없는 다른 이유로 서양의 선교사, 상인들에 의해 태국에 도입된 신문화, 신사상으로 많은 지식층에게 절대군주제가 태국 발전에 저촉된다는 생각을 깊이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원인은 라마 5세 때부터 국비 또는 자비로 유럽에서 법학, 군사학 등을 공부하던 신세대 엘리트들이 이 당시 군부의 초급 및 중견 장교로 포진되어 있었고 7명의 중심인물은 이미 유학시절인 1926년 2월 5일 파리에서 “인민당”을 창설, 태국 민주화를 위한 동지를 포섭하여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이들은 입헌군주제의 민주주의를 위한 준비를 차근히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한 근대국가로 성장한 사실, 페르시아, 중국, 러시아 등에서 일어난 혁명 등으로 새로운 제도가 정착되는 국제적인 변화에 영향을 받은 그들은 태국 내에 큰 혼란을 초래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도입하는데 묵시적으로 합의하였고 상업의 발달로 성장한 중산층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감지하고 언론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해 지지를 표시하였고 라마 7세의 민주주의 도입 의지가 고위 기득층에 의해 무산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 군부의 혁명으로 이어진 것 같다.

그러나 집권 군부와 왕과의 갈등,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 부족과 정치 무관심 등으로 상당한 진통과 군 중심 정치세력의 독재와 비리 등으로 점철된 민주화 과정은 그 후 여러 차례의 군부 쿠데타, 1973년 10월 14일 학생 의거, 1992년 5월 민주화 사태 등의 격동을 겪었다.


21세기 들어와서는 지난 2001년 처음으로 여대야소의 안정된 정권이 들어서서 안정을 이루는 것 같았으나 탁신 수상을 중심으로 한 일부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비리로 국민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손티 분야랏끌린 육군 참모총장이 주도하는 2006년 9월 19일 19번째의 쿠데타로 탁신 친나왓 (Thaksin Shinawatra) 총리가 쫓겨났고 2014년 5월 22일에는 쁘라윳 짠오차 육군 총사령관이 주도한 세력의 쿠데타로 잉락 친나왓 (Yingluck Shinawatra) 총리가 축출되고 쁘라윳이 이끄는 군사정권(국가평화유지위원회)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3년 후 헌법이 개정되고 다시 민간 정부가 들어섰다.

이런 정치적인 과도기와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 세계경제공황 등의 악순환 가운데서도 태국 국가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국가 존립과 안정세를 유지하였던 이유는 바로 국왕의 현명한 대처와 사태 수습, 그리고 국왕에 대한 모든 태국 국민의 절대적인 충성과 신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태국이 사회적 제도적 변화속에서도 탐마라차 정신의 국왕을 지도자를 모시고 있는 태국이 때로는 부럽기만 한다.


[글쓴이: 박동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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