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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과 중국 관계에서 화인(華人)의 역할

1. 태국과 중국 관계에서 화인의 역할
태국의 대중국 전략 거버넌스의 지속성과 제약을 논하기 위해서는 태국 화인의 정치적 · 경제적 역할과 영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태국과 중국 관계는 오랜 역사적 교역 관계에서 출발했으며, 화교 이주를 기반으로 깊고 단단한 연결 관계를 형성해왔다. 특히 태국 화인(ethnic Chinese)의 정착은 경제적·문화적 요인과 제도적 환경이 상호작용하며 동남아 국가들 가운데 태국적 동화가 가장 잘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태국 화인의 사회동화는 단순한 동화(同化, assimilation)가 아니라, '혼혈 + 문화적 융합 + 사회적 편입'을 통해 ‘태국적인 중국 정체성’이 유지됐다고 평가한다. 태국의 화인들은 중국적 정체성을 노골적으로 표출하지도, 그렇다고 이를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은 채 태국 사회에 점진적으로 흡수됐다. 이는 역사적으로 태국 왕실이 장기간 유입된 화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에서 비롯되며, 현대 태국 정부 또한 화인 집단의 사회 통합을 목표로 강온을 병행한 동화정책을 지속해서 추진한 것에 기인한다. 이러한 정책 환경 적응 과정에서 태국 화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상황에 따라 조절해 왔고, 그 결과 사회동화의 역사적·제도적 맥락 속에서 태국화인 특유의 유연한 정체성 양상이 형성되었다. 1900년대 초 연구학자, 윌리엄 스키너(William Skinner)는 태국 화인들이 3세대, 4세대에 이르러서는 태국인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동화되었다는 화인의 동화 특성을 언급한 바 있다.
태국의 화인들의 특징은 경제·정치 엘리트층으로 진입한 사례가 많다는 것인데, 중층적 정체성을 유지한 채 정치·경제 환경 변화에 대한 유연성이 강하다. 이들은 이러한 적응력을 바탕으로 태국 경제 발전을 주도하는 한편, 사회 전반과 비교적 조화롭게 공존해 왔다. 역사적으로도 화인의 경제적 역량과 네트워크는 태국 역대 왕조에서 왕실 세수확보 등 핵심적 임무를 수행했으며, 식민 시기에는 상업과 경제운영에 적극적으로 동원되면서 축적된 부와 경제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근현대에 이르러서 동남아 및 일본 자본과 기술 유치에 능동적인 주체가 된다. 중국 대륙 개방 이후에는 투자와 기술 이전을 통해 중-태 경제 연계를 심화시켰다. 2010년대 이후 중국기업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화인들은 중국 자본과 기술 유치의 매개자로도 자리 잡았다.
화인 경제세력의 성장과 정치적 도전에 대해 태국 정부는 때로 정치적 압박과 통제를 가했으나, 화인 엘리트들은 정치 엘리트와 협력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기업 성장을 지속하고 제도적 안정성을 확보해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화인 관료와 화인 기업가들은 전통적으로 태국–중국 관계를 연결해 온 주요 행위자였으며, 특히 탁신 친나왓 (Thaksin Shinawatra, 2001년~2006년 군부쿠데타로 실각) 정부의 등장은 양국 관계가 전환기를 맞은 중요한 시기로 평가될 수 있다.
2. 대중국 전략 거버넌스의 지속: 경제안보 협력과 지역 차원의 통합
탁신 정부 등장 이후 잦은 쿠데타 및 보수-진보 정권교체 속에서도 대체로 태국 정부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실리에 따른 균형외교 노선을 유지하고자 했다. 태국 왕실은 역사적으로 외부 세력으로부터의 과도한 개입을 회피하고자 한 전략적 자율성을 중시해 왔으며, 특히 19세기 서구 식민 팽창기에 축적된 생존 중심의 외교 경험을 통해 중립적 균형외교를 원칙화 해왔다. 시암 왕국은 영국·프랑스의 압력 속에서 두 강대국을 상호 견제시키는 실용적 균형외교를 통해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화를 피하였고, 이 경험은 이후 태국 외교에 ‘주권 보존’과 ‘복수 강대국 활용’이라는 구조적 관성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냉전기에도 태국은 미국과 안보협력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가장 빠르게 추진하는 등 특정 강대국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지 않는 유연한 외교를 지속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미-중 경쟁이 첨예한 오늘날의 태국 외교는 강대국 선택지를 넓게 유지하려는 전략적 자율성을 추구한다.
태국과 중국의 관계 심화는 화인 기업가 출신인 탁신 정부 출범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 태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경제에서 군사 분야에 이르기 까지 급속히 심화시켰으며, 경제를 비롯해 외교·정치, 군사·안보, 과학기술, 지방정부 교류에 이르기까지 협력의 범위와 수준을 다층적으로 확대하였다. 2001년부터 고위급 방위회의 정례화, 2005년 합동 군사훈련 실시 등 실질적 군사안보 협력을 확대한다. 2006년 수립된 ‘태국·중국 전략 합동 행동계획’은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 15개 분야를 포괄했는데, 이러한 태국-중국 관계의 기본 협력 틀은, 2011년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2014년 등장한 쁘라윳 군부 정권(2014–2023)은 미국의 제재로 말미암아 중국으로부터의 무기구매를 확대하고 안보 관계를 긴밀히 하는 등 더욱 밀착된 모습을 보였다. 쁘라윳 정부는 대미 관계 복원도 병행하며 재균형을 시도하였지만, 중국과의 연계가 중국산 잠수함·장갑차·로켓 등 무기 도입, 합동 군사훈련(Blue Strike 2010년~2025년) 등 실질적 군사안보 협력으로 발전해온 점이 특징적이다. 2019~2023년 기간 태국의 최대 주요 무기 공급국은 중국이었다.
태국정치에서 탁신 계열의 집권(잉락 친나왓 Yingluck Shinawatra 2011–2014; 스레타 타비신 Srettha Thavisin, 2023–2025) 과 군부∙보수 권위주의 계열(프라윳 찬오차 Prayut Chan-o-cha, 2014–2019, 2019–2023)의 반복되는 집권갈등 과정에서도 양 진영은 모두 대중국 협력 기조를 유지했다. 진보 정부뿐 아니라 왕실• 군부 보수 정권에서도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경제성장 전략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한 이유는, 경제성과를 중요시하는 유권자 표를 의식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내부정치 상황과 태국 외교의 구조적인 관계는 태국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강대국 압력에 놓일 경우, 정교한 전략 거버넌스를 조정하는데 어려움을 만드는 요인이다.
관광 및 인적 교류의 확대와 전기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중국기업의 태국 진출은 제조업·관광·디지털 경제 전반에서 중국기업의 시장 침투를 가속화하였다. 특히 전기차 산업의 급속한 부상은 태국 내 산업 구조 재편을 촉진하는 동시에 대중국 무역적자 확대라는 구조적 부담을 동반하였다. 그 결과 태국의 일대일로(BRI) 활용 거버넌스는 단기적으로 성장과 인프라 확충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으나, 중·장기적으로는 중국 경제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시킨다.
실물경제와 개발 중심 집중형 대중국 협력은 단기적으로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가시적 성과 도출에는 성공하였으나, 중·장기적으로는 대중국 경제 의존을 고착화하고 교역 구조의 다변화와 전략적 자율성을 제약하는 한계를 노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5년 9월 출범한 아누틴 연정 정부는 반도체·배터리 등 전략 산업 분야에서 중국 투자를 적극 유치하며, 태국을 중국과 ASEAN 연결의 ‘전략적 관문’으로 포지셔닝하는 기존 노선을 강화하여 체제 안정을 중시하는 보수적 실용주의를 택하고 있다.
3. 대중국 전략 거버넌스의 제약과 극복
태국과 중국의 관계는 이념적 동맹이 아닌 실용적 전략 협력으로, 정치적 비간섭과 경제적 상호의존, 제한적 안보협력을 축으로 전개되고 있다. 태국은 중국을 미국을 대체하는 대상이 아닌 보완적 파트너로 활용하며, 미·중 경쟁 속에서 자율성을 극대화하려는 헤징 전략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국의 대중국 전략 거버넌스를 제약하는 요인은 구조적·국내적·대외적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한계가 존재한다.
먼저, 미·중 전략 경쟁 격화라는 구조적 제약이다. 냉전기 태국은 미국과 안보협력(Thanat–Rusk Communiqué, 1962)을 바탕으로 한 동맹관계를 유지, 안보 측면에서 미국과 군사협력을 제도적으로 유지해 온 국가이다.
그리고, 반복되는 정권교체와 정치적 불안정성이다. 태국은 잦은 쿠데타와 정권 교체 속에서 중립이라는 대외전략의 연속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보수-진보-연정 정부의 반복 교차는 국내 엘리트층의 분화와 이해관계의 지속적인 충돌을 유발한다. 태국 내 화인 엘리트층을 비롯해, 국내 행위자들은 중국에 대해 상이한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다. 부문별·행위자별로 분절된 정책을 반복하며 중국을 비롯한 강대국 외교에 일관된 신뢰를 보내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태국은 중국과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직접 연루되지 않은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지닌 국가이다. 이로 인해, 남중국해 전략경쟁의 강대국 진영화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동맹과 포괄적 포용(inclusivity)'을 견지하며 남중국해에서의 긴장 고조화를 반대하며 선언적 중립 입장을 표명하면서 미·중 경쟁 속에서 실리와 전략적 자율성을 극대화하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이러한 단기적 전술은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중의 규범적·전략적 대립이 심화된 중장기 국면 대응을 어렵게 한다. 태국의 기능적 안보전략 선택은 어느 한쪽 강대국의 기대에 따라, 불가피한 충돌로 귀결하게 만든다.
태국 정부의 이러한 강대국 외교는 경제와 안보가 결합한 미·중 전략경쟁이라는 구조적 제약과 근본적으로 대치한다.이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단순한 수용 자형 연계에 머무르지 않고 전략 거버넌스 차원에서 조정할 필요가 있다.
과도한 대중국 경제 의존은 오히려 태국의 전략적 자율성을 제약할 수 있다. 아울러 규범 투명성과 제도적 예측성을 강화하는 규범 중심의 경제전략을 정비하여, 강대국 중심 협력의 무게중심을 분산하고, 국내 정치적 불확실성이 대외경제 전략에 미치는 영향을 제도적으로 완화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한국·인도·일본·호주·EU 등 중견국들과의 협력을 확대함으로써 경제안보 외교 포트폴리오를 적극 다변화하는 전략은 미·중 두 국가 경쟁의 압력을 분산시키고, 태국의 전략적 자율성과 협상력을 제고하는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출처: AIF 아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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