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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더리더 박번순 고려대학교세종캠퍼스경제학과교수] [편집자주] 중국, 아세안, 인도를 포함하는 아시아는 우리의 수출 50% 이상을 차지하는 중요한 시장입니다. 21세기 들어 아시아의 영향력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공장이자 시장으로서 성장한 중국, 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아시아 정책, 존재감을 유지하고자 하는 인도와 일본 그리고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하기 위해 뭉치고 있는 아세안 10개국. 우리에게는 어느 한 국가 한지역이라도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리더들은 아시아의 경제구조, 질서의 변화, 그 특성을 잘 알지 못합니다. 앞으로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 문제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지 그리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중진국 함정에 빠진 태국
겨울 방학 동안 태국의 한 대학에 체류 중이다. 마침 숙소가 태국 국제적 문제로 반납하자 1966년 제5회 대회를 열었던 방콕이 대신 맡아 열었다. 1978년에도 이 경기장에서는 아시안 게임이 열렸다. 그 때는 개최 예정 국가였던 싱가포르가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대회 반납국이 일정한 자금을 지원하고 또한 여러 나라가 十匙一飯(십시일반)하여 게임을 열었지만, 당시의 경제적 사정이나 게임 개최에 필요한 사회 인프라의 구비 상황에서 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이지만 1967년 태국의 1인당 명목 GDP는 167달러로 한국의 156달러보다 높았다. 이후 한국의 소득이 태국 소득을 추월하여, 2015년 현재 한국의 1인당 소득은 2만 7222달러로 태국의 5815달러보다 5배 가까이 많아졌다. 태국의 저성장은 중국에 비교할 때도 현저하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1978년 1인당 소득은 156달러였고, 이 때 태국의 소득은 3배 이상 많은 529달러였다. 이제 2015년 중국의 1인당 소득은 8028달러로 태국의 그것보다 훨씬 높아졌다.
성장세가 더디더라도 점진적으로 생활수준이 좋아진다면 문제는 없다. 그렇지만 1996년 태국의 불변 가격 1인당 GDP는 3706달러였으나 거의 20년이 지난 2015년 5775달러로 50% 정도 증가하는데 그쳤다. 이에 비해 훨씬 선진국인 한국은 거의 2배, 중국은 5배 정도 증가했다. 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고, 현재도 완전히 회복했다고 보기 어렵다. 향후 태국의 성장률을 연평균 3% 정도로 가정한다고 해도 인구 증가율을 고려하면 1인당 소득이 1만 달러가 되기까지는 거의 25년을 기다려야 한다.
실제로 방콕 서민들의 삶은 1990년 1년 동안 내가 방콕에 머물렀던 시절과 다름이 없다. 고층 빌딩과 고급 백화점의 뒷길에는 리어카에 국수와 볶음밥을 파는 상인들로 가득하다. 이들이 국수 한 그릇, 볶음밥 한 그릇에 40바트(약 1,200원) 정도를 받으며 서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면 이들의 삶은 20년 후에도 비슷할 것이다. 개발도상국가가 선진국이 되지 못하고 계속 중진국에 머물러 있는 현상을 ‘중진국 함정’에 빠져 있다고 한다. 태국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전형적인 중진국 함정에 빠져있는 나라이다.
무엇이 잘못되어 태국은 현재와 같은 중진국 함정에 빠져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한마디로 답을 하기는 어렵다. 경제성장은 정치, 경제, 사회구조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 모든 것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답을 해야 한다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치사회 구조의 전근대성으로 태국이 혁신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의 고도성장과 외환위기
태국은 1990년대 초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에 이은 다섯 마리 용이 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세계은행은 1993년 출간한 “동아시아의 기적” 이라는 긴 보고서에서 태국을 아시아 고도 성장국의 하나로 인정했다. 실제로 태국은 자연환경에서 축복받았다. 옛날부터 태국에는 풍요를 노래하는 “들에는 벼가 있고 강에는 물고기가 있네.”라는 말이 있었다. 열대지역에 위치해 4계절 농업에 적절한 기후, 넓은 농토, 풍부한 수량으로 1차 산업에 유리한 환경을 갖고 있다. 우리가 쌀 부족에 시달릴 때 태국은 세계 1, 2위를 다투는 쌀 수출국이었다. 더구나 常夏(상하)의 나라에 아름다운 해안을 가진 태국을 방문한 관광객은 2015년에만도 3000만 명에 이르렀다.
전통적 경제이론에 의하면 경제 성장은 노동과 자본량의 증가 및 이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는 노동과 자본의 양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자본을 사용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인구 증가 자체는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늘리고 동시에 소비 수요를 늘리면서 생산을 자극 하지만 자본 축적이 되지 못할 때는 부담이 된다. 모두가 빈곤한 가운데 인구 증가는 저축을 어렵게 하며 그 결과 자본 축적에 필요한 투자가 증가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인구가 소비 주체로서 생산을 유발하는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 국가들은 인구 증가율을 둔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태국도 다르지 않아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우리와 같이 가족계획을 실시했고 큰 성공을 거둔 나라의 하나가 되었다.
인구 증가율은 둔화되었지만 국내 자본 축적은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업화 과정에서 태국은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데 공을 들였다. 특히 1980년대 들어 태국은 외국인 투자를 대대적으로 유치하기 시작했다.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농업이 비대한 태국에서 저축은 한계가 있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 기업가나 기업가 정신이 취약했다는 것이다. 국내에는 기업가 계층이 존재했지만 이들은 주로 화교 자본가들로서 제조업 보다는 유통, 부동산, 금융 등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저렴한 태국의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외국인 투자가 물밀 듯이 유입되었고 태국은 고도성장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전반까지 유례없는 호황을 보인 태국은 이를 구조조정 기회로 활용하지 못했고 자산 버블을 쌓아갔다. 이 시기 인건비가 더 싼 중국이 국제 시장에서 강력한 공산품 수출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두 자릿수로 증가하던 수출은 1996년 더 이상 증가하지 않았다. 대신 버블로 인한 소비 수요는 진정되지 않았다. 1996년경 태국은 세계에서 벤츠 자동차가 독일 다음으로 많이 팔리는 국가였다.
이 시기의 태국 경제의 성장 요인은 노동 투입 증가와 자본, 특히 외국인 투자에 의한 자본의 축적이었다. 개발도상 단계에서는 노동이나 자본 등 소위 투입 요소의 증가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일정한 단계가 되면 효율성이 성장 원천으로 더욱 중요해진다. 바로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수확체감의 법칙 때문이다. 태국은 이제 효율성이 경제 성장을 견인해야 했다. 기술의 진보를 만들어 내고 더 질 좋은 노동을 육성하고 산업 구조를 고도화해야 했다. 그러나 태국은 이에 실패했고 그것은 1997년 외환위기로 나타났다.
교육 수준 제고, 기술 혁신, 사회 인프라의 확충, 정부 정책의 투명성 제고, 법치의 확립 등 기업 환경 개선, 창의성을 개발하는 사회적 분위기 등 효율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태국은 이 어느 하나에서도 개선이 없었다. 태국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학교 진학률이 40%에 미치지 못했다. 동남아 주요국 중에서 노동자의 교육 연한이 가장 낮은 나라가 태국이다. 고등 교육의 질은 평균적으로 낮았다.
혁신이 없는 상태에서 경제의 주요 부분을 외국인 기업에게 맡겨 놓아 산업 주권조차 상실했다.
태국의 가장 중요한 제조업인 자동차와 전자산업은 모두 일본 기업에 의해 발전했다. 2016년 자동차 내수 판매량은 약 77만대에 이르렀으나 이중 태국에서 생산되는 일본차 비중이 88%에 이르렀고 특히 도요타 자동차의 시장 점유율은 31.8%에 이르렀다.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태국을 상용차의 주요 생산지로 삼고 있고, 지난해 거의 120만대 가까운 자동차를 수출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1톤 픽업트럭이었다. 태국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자동차부품 산업의 경우도 태국에 진출한 일본 부품 업체들이 지배를 한다. 일본 조립 업체에 부품을 공급하는 태국 기업들이 일부 있지만 그들은 일본 기업과 합작을 했거나 기술 협력을 하는 기업들이다.
전자산업의 경우도 일본 업체들이 시작했다. 일본의 ‘나쇼날 파나소닉’은 1959년 처음 태국에 진출했고 전자 특히 가전산업은 일본 기업의 독무대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전자산업은 반도체, 정보통신기기 등으로 그 중심이 이전해 가고 있다. 또한 일본 가전업체가 한국 기업에게 경쟁력을 잃어가면서 태국의 전자산업 역시 새로운 성장 분야로 진출하지 못했다. 태국인들이 자체 브랜드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전자산업 역시 자동차산업과 동일하다.
정보통신의 혁명 속에서도 태국은 뒤졌다. 한국의 네이버 메신저 서비스 프로그램인 ‘라인’은 일본을 돌아 먼 길을 와서 태국 사람들을 일상을 붙들어 맸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태국의 청소년층뿐만 아니라 중년 여인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은 한국 드라마가 스토리텔링이 좋다고 평가한다.
외국 기업이 주요 산업을 지배할 때 해당 산업과 국내 산업의 연관도는 높아지지 않는다. 국내 중소기업이 성장 산업의 가치사슬에 참여하기 어렵다. 국내에서 노동력을 질을 제고하지 못하고 국내 자본이나 기업가를 육성하지 못한 이유, 그리고 혁신을 만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태국의 정치경제의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
관료제적 자본주의의 폐해
태국의 자본주의를 ‘관료제적 자본주의’라고 칭한다. 군인에서 출발한 정치인의 기업 지분 확보, 기업인들의 정계 진출 등으로 정치인들이 기업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정치인의 기업 운영은 1950년대 말 사릿(Sarit)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현역 군인이든 퇴역 군인이든 군인 지배의 태국 정치는 1990년대 전반까지 계속되었다. 군부는 은행과 많은 사업체 그리고 방송국을 직접 소유하고 있다. 이들은 정부나 의회의 통제 밖에서 사업 활동을 하고 있다. 사릿 정권은 군부 역할을 강조하면서 이전 정권에서 거의 유폐되다시피 했던 국왕의 활동을 보장하고, 군부는 국가(nation), 종교(religion), 그리고 국왕(monarchy)를 지키는 보루라고 주장했다. 군부에 반대하는 것은 국가를 반대하는 것이고 국민 대부분이 신봉하는 불교를 부정하는 것이고 나아가 국왕을 모독하는 일이 되었다.
한편 왕실은 태국 관료적 자본주의의 정점에 있다. 왕실 재산관리처는 방콕과 전국에 대규모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다. 상업은행 시암 커머셜뱅크와 최대 기업 집단인 시암 시멘트 그룹을 갖고 있다. 또한 직접 통제는 아니지만 100여 기업에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1997년의 경우 왕실 재산관리처의 매출은 규모는 제2위 기업집단에 비해서도 훨씬 많았고 2014년 현재 왕실의 자산은 거의 440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왕실, 군 출신 기업가, 그리고 현직 군부의 기업, 기업인에서 정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빠르게 변해가는 기술 진보를 따라가기 어렵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입법을 하고 정책을 운용한다. 국제 경쟁과 관계없는 내수 분야에서 사업을 확대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국민들의 생활을 통제해야 한다. 교육의 내용은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질서 있는 사회에 적응하는 사람들을 길러내는데 치중한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수상은 새해 들어 전국 모든 학생들에게 도덕과 윤리시험을 치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앞사람이 지갑을 떨어뜨리거나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할 것이냐?” 등을 시험문제로 낼 수 있다고 말했다. 태국 대학생들은 여전히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녀야 한다. 20대 초반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많은 대학생들이 흰 셔츠에 검은 바지 아니면 무릎 아래로 치렁치렁 내려오는 검은 치마를 입고 학교에 다닌다. 거기에서 어떤 혁신이 만들어지겠는가?
관료제적 자본주의는 경제의 이중 구조를 낳는다. 태국의 계층 간 소득격차나 都農(도농)간 격차, 즉 방콕과 지방의 격차는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크다. 방콕 안에서도 도시비공식 분야라고 불리는 거리의 노점상이나 영세 상인들과 관료제 자본주의의 수혜를 받은 계층과의 차이도 크다.
방콕의 최저 임금은 2012~2016년 기간, 하루 300바트(약 1만원)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2017년에는 10바트(330원) 올랐다. 방콕의 중심가에 있는 백화점 시암 파라곤은 아시아에서도 가장 큰 백화점 중의 하나인데 왕실 재산관리처의 땅을 30년 임대로 지은 것이다. 백화점의 스타벅스에서 팔리는 커피 한잔은 최저 임금의 절반에 육박하고 있다.
방콕에서 관료제적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농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자연적으로 농업의 잠재적 경쟁력은 높지만 토지 단위당 쌀의 생산성은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훨씬 낮아 농촌의 빈곤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최소한의 기능도 갖추지 못한 채 방콕으로 올라와 도시 비공식 분야로 흡수되고 있고 농촌 인구는 늙어간다. 방콕과 방콕 이외 지역은 마치 서로 다른 나라처럼 존재하고 있다.
방콕의 중심 지역에 있는 엘리트들은 국가의 미래에 아랑곳 하지 않고 권력의 유지에만 급급하면서 여전히 시스템으로서의 투명성은 강화되지 않았다.
국가 비전은 오간데 없고 민주화는 후퇴한다. 태국 경제의 성장의 기적을 가져왔던 외국인 투자는 2000년대 들어 중국으로 몰려갔다. 2010년이 되면 이제 베트남이 외국인 투자를 끌어갔다. 한국 기업의 투자로 베트남의 전자제품 수출은 지난해 11월말까지 480억 달러 이상이었다.
태국의 경우 같은 기간 전기·전자 제품의 수출은 400억 달러였다. 앞으로 베트남이 총수출에서도 태국을 추월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태국은 길을 잃었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어디서 문제가 풀려야 할지 알 수 없다. 한국전에 참여하여 우리를 도왔던 태국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아시안 게임을 개최했던 태국이다. 태국의 사례를 보면서 정치 사회 구조의 민주적 운용이 얼마나 중요한가, 경제의 민주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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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번순 고려대학교세종캠퍼스경제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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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번순 고려대 세종캠퍼스 경제학과 교수 |
겨울 방학 동안 태국의 한 대학에 체류 중이다. 마침 숙소가 태국 국제적 문제로 반납하자 1966년 제5회 대회를 열었던 방콕이 대신 맡아 열었다. 1978년에도 이 경기장에서는 아시안 게임이 열렸다. 그 때는 개최 예정 국가였던 싱가포르가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대회 반납국이 일정한 자금을 지원하고 또한 여러 나라가 十匙一飯(십시일반)하여 게임을 열었지만, 당시의 경제적 사정이나 게임 개최에 필요한 사회 인프라의 구비 상황에서 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이지만 1967년 태국의 1인당 명목 GDP는 167달러로 한국의 156달러보다 높았다. 이후 한국의 소득이 태국 소득을 추월하여, 2015년 현재 한국의 1인당 소득은 2만 7222달러로 태국의 5815달러보다 5배 가까이 많아졌다. 태국의 저성장은 중국에 비교할 때도 현저하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1978년 1인당 소득은 156달러였고, 이 때 태국의 소득은 3배 이상 많은 529달러였다. 이제 2015년 중국의 1인당 소득은 8028달러로 태국의 그것보다 훨씬 높아졌다.
성장세가 더디더라도 점진적으로 생활수준이 좋아진다면 문제는 없다. 그렇지만 1996년 태국의 불변 가격 1인당 GDP는 3706달러였으나 거의 20년이 지난 2015년 5775달러로 50% 정도 증가하는데 그쳤다. 이에 비해 훨씬 선진국인 한국은 거의 2배, 중국은 5배 정도 증가했다. 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고, 현재도 완전히 회복했다고 보기 어렵다. 향후 태국의 성장률을 연평균 3% 정도로 가정한다고 해도 인구 증가율을 고려하면 1인당 소득이 1만 달러가 되기까지는 거의 25년을 기다려야 한다.
실제로 방콕 서민들의 삶은 1990년 1년 동안 내가 방콕에 머물렀던 시절과 다름이 없다. 고층 빌딩과 고급 백화점의 뒷길에는 리어카에 국수와 볶음밥을 파는 상인들로 가득하다. 이들이 국수 한 그릇, 볶음밥 한 그릇에 40바트(약 1,200원) 정도를 받으며 서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면 이들의 삶은 20년 후에도 비슷할 것이다. 개발도상국가가 선진국이 되지 못하고 계속 중진국에 머물러 있는 현상을 ‘중진국 함정’에 빠져 있다고 한다. 태국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전형적인 중진국 함정에 빠져있는 나라이다.
무엇이 잘못되어 태국은 현재와 같은 중진국 함정에 빠져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한마디로 답을 하기는 어렵다. 경제성장은 정치, 경제, 사회구조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 모든 것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답을 해야 한다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치사회 구조의 전근대성으로 태국이 혁신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의 고도성장과 외환위기
태국은 1990년대 초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에 이은 다섯 마리 용이 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세계은행은 1993년 출간한 “동아시아의 기적” 이라는 긴 보고서에서 태국을 아시아 고도 성장국의 하나로 인정했다. 실제로 태국은 자연환경에서 축복받았다. 옛날부터 태국에는 풍요를 노래하는 “들에는 벼가 있고 강에는 물고기가 있네.”라는 말이 있었다. 열대지역에 위치해 4계절 농업에 적절한 기후, 넓은 농토, 풍부한 수량으로 1차 산업에 유리한 환경을 갖고 있다. 우리가 쌀 부족에 시달릴 때 태국은 세계 1, 2위를 다투는 쌀 수출국이었다. 더구나 常夏(상하)의 나라에 아름다운 해안을 가진 태국을 방문한 관광객은 2015년에만도 3000만 명에 이르렀다.
전통적 경제이론에 의하면 경제 성장은 노동과 자본량의 증가 및 이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는 노동과 자본의 양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자본을 사용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인구 증가 자체는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늘리고 동시에 소비 수요를 늘리면서 생산을 자극 하지만 자본 축적이 되지 못할 때는 부담이 된다. 모두가 빈곤한 가운데 인구 증가는 저축을 어렵게 하며 그 결과 자본 축적에 필요한 투자가 증가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인구가 소비 주체로서 생산을 유발하는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 국가들은 인구 증가율을 둔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태국도 다르지 않아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우리와 같이 가족계획을 실시했고 큰 성공을 거둔 나라의 하나가 되었다.
인구 증가율은 둔화되었지만 국내 자본 축적은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업화 과정에서 태국은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데 공을 들였다. 특히 1980년대 들어 태국은 외국인 투자를 대대적으로 유치하기 시작했다.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농업이 비대한 태국에서 저축은 한계가 있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 기업가나 기업가 정신이 취약했다는 것이다. 국내에는 기업가 계층이 존재했지만 이들은 주로 화교 자본가들로서 제조업 보다는 유통, 부동산, 금융 등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저렴한 태국의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외국인 투자가 물밀 듯이 유입되었고 태국은 고도성장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전반까지 유례없는 호황을 보인 태국은 이를 구조조정 기회로 활용하지 못했고 자산 버블을 쌓아갔다. 이 시기 인건비가 더 싼 중국이 국제 시장에서 강력한 공산품 수출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두 자릿수로 증가하던 수출은 1996년 더 이상 증가하지 않았다. 대신 버블로 인한 소비 수요는 진정되지 않았다. 1996년경 태국은 세계에서 벤츠 자동차가 독일 다음으로 많이 팔리는 국가였다.
이 시기의 태국 경제의 성장 요인은 노동 투입 증가와 자본, 특히 외국인 투자에 의한 자본의 축적이었다. 개발도상 단계에서는 노동이나 자본 등 소위 투입 요소의 증가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일정한 단계가 되면 효율성이 성장 원천으로 더욱 중요해진다. 바로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수확체감의 법칙 때문이다. 태국은 이제 효율성이 경제 성장을 견인해야 했다. 기술의 진보를 만들어 내고 더 질 좋은 노동을 육성하고 산업 구조를 고도화해야 했다. 그러나 태국은 이에 실패했고 그것은 1997년 외환위기로 나타났다.
교육 수준 제고, 기술 혁신, 사회 인프라의 확충, 정부 정책의 투명성 제고, 법치의 확립 등 기업 환경 개선, 창의성을 개발하는 사회적 분위기 등 효율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태국은 이 어느 하나에서도 개선이 없었다. 태국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학교 진학률이 40%에 미치지 못했다. 동남아 주요국 중에서 노동자의 교육 연한이 가장 낮은 나라가 태국이다. 고등 교육의 질은 평균적으로 낮았다.
혁신이 없는 상태에서 경제의 주요 부분을 외국인 기업에게 맡겨 놓아 산업 주권조차 상실했다.
태국의 가장 중요한 제조업인 자동차와 전자산업은 모두 일본 기업에 의해 발전했다. 2016년 자동차 내수 판매량은 약 77만대에 이르렀으나 이중 태국에서 생산되는 일본차 비중이 88%에 이르렀고 특히 도요타 자동차의 시장 점유율은 31.8%에 이르렀다.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태국을 상용차의 주요 생산지로 삼고 있고, 지난해 거의 120만대 가까운 자동차를 수출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1톤 픽업트럭이었다. 태국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전자산업의 경우도 일본 업체들이 시작했다. 일본의 ‘나쇼날 파나소닉’은 1959년 처음 태국에 진출했고 전자 특히 가전산업은 일본 기업의 독무대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전자산업은 반도체, 정보통신기기 등으로 그 중심이 이전해 가고 있다. 또한 일본 가전업체가 한국 기업에게 경쟁력을 잃어가면서 태국의 전자산업 역시 새로운 성장 분야로 진출하지 못했다. 태국인들이 자체 브랜드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전자산업 역시 자동차산업과 동일하다.
정보통신의 혁명 속에서도 태국은 뒤졌다. 한국의 네이버 메신저 서비스 프로그램인 ‘라인’은 일본을 돌아 먼 길을 와서 태국 사람들을 일상을 붙들어 맸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태국의 청소년층뿐만 아니라 중년 여인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은 한국 드라마가 스토리텔링이 좋다고 평가한다.
외국 기업이 주요 산업을 지배할 때 해당 산업과 국내 산업의 연관도는 높아지지 않는다. 국내 중소기업이 성장 산업의 가치사슬에 참여하기 어렵다. 국내에서 노동력을 질을 제고하지 못하고 국내 자본이나 기업가를 육성하지 못한 이유, 그리고 혁신을 만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태국의 정치경제의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
관료제적 자본주의의 폐해
태국의 자본주의를 ‘관료제적 자본주의’라고 칭한다. 군인에서 출발한 정치인의 기업 지분 확보, 기업인들의 정계 진출 등으로 정치인들이 기업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정치인의 기업 운영은 1950년대 말 사릿(Sarit)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현역 군인이든 퇴역 군인이든 군인 지배의 태국 정치는 1990년대 전반까지 계속되었다. 군부는 은행과 많은 사업체 그리고 방송국을 직접 소유하고 있다. 이들은 정부나 의회의 통제 밖에서 사업 활동을 하고 있다. 사릿 정권은 군부 역할을 강조하면서 이전 정권에서 거의 유폐되다시피 했던 국왕의 활동을 보장하고, 군부는 국가(nation), 종교(religion), 그리고 국왕(monarchy)를 지키는 보루라고 주장했다. 군부에 반대하는 것은 국가를 반대하는 것이고 국민 대부분이 신봉하는 불교를 부정하는 것이고 나아가 국왕을 모독하는 일이 되었다.
한편 왕실은 태국 관료적 자본주의의 정점에 있다. 왕실 재산관리처는 방콕과 전국에 대규모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다. 상업은행 시암 커머셜뱅크와 최대 기업 집단인 시암 시멘트 그룹을 갖고 있다. 또한 직접 통제는 아니지만 100여 기업에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1997년의 경우 왕실 재산관리처의 매출은 규모는 제2위 기업집단에 비해서도 훨씬 많았고 2014년 현재 왕실의 자산은 거의 440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왕실, 군 출신 기업가, 그리고 현직 군부의 기업, 기업인에서 정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빠르게 변해가는 기술 진보를 따라가기 어렵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입법을 하고 정책을 운용한다. 국제 경쟁과 관계없는 내수 분야에서 사업을 확대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국민들의 생활을 통제해야 한다. 교육의 내용은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질서 있는 사회에 적응하는 사람들을 길러내는데 치중한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수상은 새해 들어 전국 모든 학생들에게 도덕과 윤리시험을 치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앞사람이 지갑을 떨어뜨리거나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할 것이냐?” 등을 시험문제로 낼 수 있다고 말했다. 태국 대학생들은 여전히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녀야 한다. 20대 초반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많은 대학생들이 흰 셔츠에 검은 바지 아니면 무릎 아래로 치렁치렁 내려오는 검은 치마를 입고 학교에 다닌다. 거기에서 어떤 혁신이 만들어지겠는가?
관료제적 자본주의는 경제의 이중 구조를 낳는다. 태국의 계층 간 소득격차나 都農(도농)간 격차, 즉 방콕과 지방의 격차는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크다. 방콕 안에서도 도시비공식 분야라고 불리는 거리의 노점상이나 영세 상인들과 관료제 자본주의의 수혜를 받은 계층과의 차이도 크다.
방콕의 최저 임금은 2012~2016년 기간, 하루 300바트(약 1만원)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2017년에는 10바트(330원) 올랐다. 방콕의 중심가에 있는 백화점 시암 파라곤은 아시아에서도 가장 큰 백화점 중의 하나인데 왕실 재산관리처의 땅을 30년 임대로 지은 것이다. 백화점의 스타벅스에서 팔리는 커피 한잔은 최저 임금의 절반에 육박하고 있다.
방콕에서 관료제적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농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자연적으로 농업의 잠재적 경쟁력은 높지만 토지 단위당 쌀의 생산성은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훨씬 낮아 농촌의 빈곤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최소한의 기능도 갖추지 못한 채 방콕으로 올라와 도시 비공식 분야로 흡수되고 있고 농촌 인구는 늙어간다. 방콕과 방콕 이외 지역은 마치 서로 다른 나라처럼 존재하고 있다.
방콕의 중심 지역에 있는 엘리트들은 국가의 미래에 아랑곳 하지 않고 권력의 유지에만 급급하면서 여전히 시스템으로서의 투명성은 강화되지 않았다.
국가 비전은 오간데 없고 민주화는 후퇴한다. 태국 경제의 성장의 기적을 가져왔던 외국인 투자는 2000년대 들어 중국으로 몰려갔다. 2010년이 되면 이제 베트남이 외국인 투자를 끌어갔다. 한국 기업의 투자로 베트남의 전자제품 수출은 지난해 11월말까지 480억 달러 이상이었다.
태국의 경우 같은 기간 전기·전자 제품의 수출은 400억 달러였다. 앞으로 베트남이 총수출에서도 태국을 추월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태국은 길을 잃었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어디서 문제가 풀려야 할지 알 수 없다. 한국전에 참여하여 우리를 도왔던 태국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아시안 게임을 개최했던 태국이다. 태국의 사례를 보면서 정치 사회 구조의 민주적 운용이 얼마나 중요한가, 경제의 민주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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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번순 고려대학교세종캠퍼스경제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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